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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나를 위로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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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어디 목적지를 정하고 걸은 건 아니었다. 어스름이 내리던 시간, 나는 불빛을 적시며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친구와의 약속이 미뤄지는 바람에 발길을 돌리려다, 기왕 나선 길이니 무작정 걷기로 작정했던 터다. 모처럼 배회하는 밤거리. 가로수들이 한가로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바람은 차고 스산했다. 그런데 가슴이 설레는 건 왜 일까. 그럴 만도 했다. 학창 시절, 불빛을 그리워하며 정처 없이 떠돌던 거리였기에 가슴 벅찼을 것이다.

문득 어느 한 포장마차가 떠올랐다. 언젠가 한 번 꼭 가보고 싶었던 곳, 때론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추억을 담아오자고 생각했던 곳이다. 마음이 허기증을 느끼던 내 젊은 날, 초가을의 삽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포장마차다. 낱잔으로 팔던 대포 한 잔에 뜨끈뜨끈한 오뎅 하나면 마음이 넉넉해졌다. 어쩌다 국물 속에 큼직한 무 한 토막이 얹어지면 푸짐한 안주가 되곤 했다. 술이 한 순배 돌면 마차 안은 한 가족이 됐다. 나는 그곳에서 추억을 마실 참이었다.

그러나 그 포장마차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카바이드 등(燈)의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내 젊은 날의 희로애락이 물결치던 그 흔적은 없었다. 자우룩하게 피어올랐던 그 불빛은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허전해지는 가슴을 감싸주는 체온과도 같았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따스했던 불빛을 찾을 수가 없다. 대신 길 저편에 실내 주점이 가을바람에도 끄떡없는 형광등 불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그 눈부신 불빛 아래 나는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을 마셨다.

계절 탓인가. 어째 혼자 술을 마시는 혼술족이 눈에 띄게 많다. 그러고 보니 작은 탁자들이 여럿 있다. 요즘 흔한 풍경이라니 술 문화 패턴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모양이다. 그 당시 어지간해선 혼술하기가 힘들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유난했다. 뜸하게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길손을 보면 무슨 큰 사연이 있는 양 색안경으로 봤다. 모두가 그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멀쩡할 수야 없지 않은가.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소주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내 추억의 포장마차는 혼술족의 아지트였다. 거기엔 외로움을 받아줄 정감이 넘실거렸다. 술보다 낭만을 마셨다. 지금은 그런 포근한 포장마차는 없다. 그래서일까. 홀로 기울이는 술잔마다 쓸쓸함이 묻어난다. 출렁거리는 술에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누군가 잔을 비우면서 저 세렝게티 초원의 한복판에 홀로 서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들려줄 사람도, 받아줄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혼술이다. 혼술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다독거리고, 사투와 인내의 흔적이 보이는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더러는 허공을 응시하면서. 술잔에는 오늘과 어제만 있는 게 아니다. 차분히 내일을 설계하는 시간표도 담겨 있다. 미래의 시간표에는 마음껏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 설령 공상할지언정 이 번잡한 일상에서 그런 시간을 어디서 덜어줄까 싶다.

나를 위로 하는 시간! 그랬다. 나는 어제와 오늘, 내일을 넘나들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던 거다. 번민을 지우고, 아린 가슴을 달래고, 삶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혜를 하나하나 일군 시간들. 그래서 일상의 갈피마다 인내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북돋운 거름의 시간들. 저 아련한 추억의 포장마차가 그리워지는 건 현재를 있게 한 그때의 시간들을 쓰다듬으며 포옹하고 싶음에서일 것이다. 나는 그 보석 같은 시간들을 되새기며 불빛 적신 거리를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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