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푸르게 저렇듯 높아졌다. 구불구불 오르는 길도 정겨워라. 모퉁이 숲을 굽이쳐 돌아 나가는 올망졸망한 길들이 리드미컬 경쾌하다. 서울 도심에 이런 한갓진 드라이브 코스가 있었나 싶다. 북악 스카이웨이. 산그늘이 짙게 내려서일까. 북악산 자락은 가을빛이 또렷했다. 연초록이 엷어져가는 숲마다 소슬하다. 나뭇잎들의 춤사위도 그 뜨겁게 작열하던 여름철 자태가 아니다. 슬로우 스텝으로 너울거리며 반짝거린다. 자동차들도 덩달아 느릿느릿 완보한다.
그렇게 들른 곳이 북악산 팔각정! 전망대에 올라서면 또 한 번 놀란다. 산 아래로 두 판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완만하게 뻗은 산 앞쪽으로는 첨단 파노라마. 회색빛 빌딩과 아파트들이 빼곡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는 넓혀지고 치솟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파른 뒤쪽 아래 마을은 초록색 숲속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들어앉은 모자이크 같은 그림이다. 표정은 그래서 극적이다. 앞쪽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반면 뒤쪽은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이다.
번잡하게 돌아가는 거대한 도심과 전형적인 작은 산골. 한 지붕 아래 서울이면서 어쩜 이렇게 풍경이 다를 수가 있을까? 팔각정 전망대에 동그마니 앉아 있는 '느린 우체통'이 속도 만능주의 시대에 느림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라고 물음을 던진다. 애틋한 사연을 담은 편지를 행선지까지 느릿느릿 전달해준대서 붙여진 '느린 우체통'. 도착하는데 1년이 걸린다니, 촌각을 앞다퉈달라고 몹시도 보채는 첨단유행 입장에선 이런 미련 곰탱이가 없을 거다.
그 느림보 우체통은 나직이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느리게 산다는 건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시대에 조바심과 성급함에서 놓칠 수 있는 모자람을 채우는 작업이라고. 열띤 경쟁 속에 앞만 보고 달리느라 허기증을 느꼈을 사람다움 삶을 얼마만큼 가꾸었는지? 그 길게 늘어난 세월의 뒤안길을 한번쯤 되돌아보라고 마음의 창을 노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피드 시대에 노출되는 모자람은 어쩌면 펜을 꾹꾹 눌러가며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절로 채워지는 건 아닐까.
이 스산한 계절, 어딘가 응시하는 듯한 우체통이 처연하다. 젊은 날 각인된 우체통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공연히 마음이 설렜다. 먼 데서 누군가가 보낸 사연을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래려 달을 쳐다보곤 하던 그 시절, 우체통은 마음의 고향 같은 것이었다. 어쩌다 거리의 우체통을 마주치면 막연한 기다림으로 서성거리곤 했다. 초를 다투며 전달되는 디지털 메모지가 없던 그 시절, 사람들은 편지를 쓰며 느림과 기다림의 정서를 배웠다.
속도가 곧 경쟁력으로 통하는 세상. 편지가 느림보라고 해서 구시대 유물이 아니다. 느림이 빚어내는 따스한 감성 가치가 살아 숨 쉰다. 꼭꼭 봉해진 편지를 뜯을 때의 설렘을 생각해보라.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써내려간 손 글씨는 또 어떤가. 글씨체가 비뚤배뚤해도 행간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우표를 붙이고, 마음을 담아 우체통에 넣었을 편지. 단 몇 줄의 내용일지언정 울림은 크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열게도 하고, 고단한 삶을 한 순간에 녹이기도 한다.
동네 우체통도 처연한가 싶어 눈길이 자주 간다. 그런데 뜻밖이다. 우두커니 선 채 빼꼼히 얼굴만 내미는가했더니 매일 편지 물량이 들어온단다. 하루 평균 열댓 통은 된다며 우체국 집배원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느림의 가치가 꿈틀거림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온통 빠름이 미덕인 시대에 반짝거리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노라고 다짐하는 어느 유행가 가사가 굳이 펜을 건네지 않더라도 고즈넉한 가을의 향기를 담은 편지를 꼭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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