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김장시즌인가? 집근처 난전에 벌여놓은 채소가 그렇다고 손짓한다. 보자기 좌판 위에 무청이 줄느런히 포개져 있다. 무청과 촌수가 어슷비슷한 배추 겉대도 후줄근히 늘어져 있다. 그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청을 다듬는 할머니의 굼뜬 손길. 이 셋은 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한가롭고, 그러나 안쓰럽게 보이는 그 풍경을 따사롭게 쬐여주는 햇볕이 너무도 반갑고 고맙다. 그 다소곳한 난전에 장보러 나온 아주머니들이 빼꼼히 끼어들면 장터는 복닥거린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는 허허하게 웃고 있었다. 잘 팔리느냐고 여쭙자 돌아오는 대답이 엉뚱하다. 그렁저렁 팔리긴 하는데 사람 보는 게 더 재미있다고 하신다. 그 정겨운 말이 왜 이리 슬프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만나 말문을 여는 게 즐거울 만큼 정녕 외로웠던 걸까? 그래서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나온 걸까? 누군가 무청으로 요리하는 비책을 물어올 양이면 그렇게 표정이 밝을 수가 없다. 할머니에겐 난전이란 삶의 얘기꽃을 파는 동네 사랑방이었다.
김장대목을 맞은 장터엔 그러나 정작 있어야 할 배추와 무가 없다. 휑하다. 어지간해선 온라인 장터에서 절인 배추를 배달 주문해 김장을 담그는 세태니 당연한 귀결의 풍경일 것이다. 그 공허함이 무색했는지 할머니는 무청과 배추 겉대를 가리키며 이게 요즘 상전 대접을 받는다고 추켜세운다. 어릴 적 장터에선 공짜로 얻곤 했는데 지금은 팔고 있다며 할머니는 멋쩍어하신다. 오랜 세월 무청과 배추 겉대와 함께 했을 할머니의 모습에서 어느 옛 김장 장터를 보았다.
내 어릴 적 김장철엔 장터마다 배추와 무가 산더미같이 쌓였다. 층층이 포개 수북수북했다. 집집마다 김장을 적게는 수십 포기씩, 식솔이 많은 댁네는 백 수십 포기까지 담갔으니 그랬을 것이다. 담벼락 같은 배추더미에 사다리가 걸쳐지면 금세 동났다. 장정들이 배추를 주고받으며 손수레에 실었다. 배추와 무는 하늘을 날아다녔다. 바닥을 드러내면 배추에서 떨어져나간 겉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다듬고 남은 무청이 나뒹굴었다. 줍는 게 임자였지만 남아돌았다.
사람들은 무청과 배추 겉대를 주웠다는 말끝에 붙이는 수식어엔 슬픔이 스며있었다. 거친 흙바람과 거센 비를 견뎌온 흔적. 푸르죽죽한 무청과 배추 겉대에는 아픔이 보인다. 허연 무와 노란 배추 속살을 보호하려 안간힘을 썼으니 거죽이 성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무와 배추 속살은 달고 부드러웠지만 겉대들은 늘 쓰고 거칠었다. 사람들은 질기다고 온갖 투정을 부렸지만 막장 메뉴로 식탁을 지켜왔다. 겉대들은 흙바람이었고, 배고픔이었으며, 모진 세월이었다.
김장을 마치고 나오면 늘 천덕꾸러기 처지였던 겉대들. 이제 그 푸석거리고 시들하던 겉대들이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웰빙 라이프 메뉴가 되고, 그래서 구하기 힘든 품귀 상품이 되고, 돈이 됐다. TV 화면을 보니 강원도 어느 농가에선 주객이 전도됐다. 무청을 사면 무가 덤으로 얹어진다는 게 이 농가의 마케팅 전략이란다. 무청을 겨우내 말리면 시래기. 누렇게 변신할 즈음 상품의 부가가치가 깡충 뛴단다. 그 농가에선 무청이 상품이고 무가 부속물이다.
그러고 보면 김장 겉대들은 참 겸손하다. 삶이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몸값이 뛰었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토속적인 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다. 은근하고 웅숭깊다. 늘 한결같다. 주린 배를 채워주던 구황음식 시절이나, 웰빙식품으로 등극한 지금이나 찬물에 몸을 풀어 따스한 국과 탕이 되어준다. 모나지도 않다. 모든 음식에 어울린다. 된장을 풀면 기막히게 구수한 맛을 낸다. 겉대들은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걸 이렇게 가르침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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