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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한국판 ‘에치고 츠마리’는 가능할까

홍경한(미술평론가)



1977년 이후 독일 북부의 작은 도시 뮌스터에서 10년마다 펼쳐지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는 삶과 근접한 미술의 살아 있는 역사로써, 예술이 일상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지각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로 꼽힌다. 예술과 인간, 자연과 예술이 조화로운 미래의 공공미술을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국제전이기도 하다.

2000년 시작된 '에치고 츠마리 트리엔날레'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의 일본판이다. 때문에 '에치고 츠마리' 또한 그곳(장소, 공간)에 거주하는 인간 삶과 밀접한 미술언어를 창조하며, 삶 속에서의 예술실천을 중시한다. 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감상자로서의 주민이라는 예술주체의 구분 없이 작가와 주민이 동등하게 아이디어를 내고 주어진 자연과 환경을 무대로 사회적 문맥에 관여하는 작품을 생산한다는 게 특징이다.

일본은 유독 자연과 인간의 맥락에 주목하는 국제행사가 많은데, 1987년 시작된 '나오시마 프로젝트'도 그 중 하나이다. 나오시마 개발의 선구자인 후쿠타케 가문과 베네세그룹, 그리고 예술이라는 독창적인 콘텐츠와의 조화로움으로 완성된 이 프로젝트는 1997년부터 시작된 '아트하우스프로젝트'와 2010년 첫 삽을 뜬 '세토우치 국제 아트 페스티벌'과 함께 지금도 예술·자연·사람이 함께 살아 숨 쉬는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예술과 일상은 평등하게 양립해야 한다는 목적의 동일함이다. 미술의 민주적 공유와 공동체와의 미적 협업을 전제로 한다는 것 또한 공통분모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벤치마킹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 중 출산율 저하에 따른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의한 공동체 붕괴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의 여러 지자체를 비롯한 몇몇 국제행사들은 이 세 현대 미술제를 모델로 삼고 있다.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고 지역 및 관광산업 활성화, 도시재생의 현실적 대안으로 혹은 차용 가능한 새로운 미술 형식으로 바라본다.

흥미로운 건 넘치는 의욕과 달리 실체적 구현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제주도를 포함한 고흥군, 하동군 등 여러 지자체들이 현장을 견학하고 다양한 정보를 취합해 자신의 고장에 접목시키려 노력해왔으나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저마다 천혜의 자연이라는 자산과 잠재력을 내세우지만 '제2의 무엇'은 요원하기만 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우리에겐 '나오시마'처럼 수천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오랜 기간 문화예술에 투자하는 기업 및 기관을 찾아보기 힘들다. '에치고 츠마리'의 저력인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지속 가능한 정책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뮌스터'와는 달리 지자체장이 바뀌면 행사의 지속성은 불투명해지기 일쑤이며, 진두지휘할 예술감독이나 담당 공무원 임기 역시 1-2년을 넘지 못한다.

40여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나, 약 20여 년 동안 한결같은 '에치고 츠마리', 30여년을 이어 온 '나오시마 프로젝트'는 길고 긴 투자와 인내, 협업의 산물이지 조바심에 급조된 행사가 아니다. 예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역의 미래를 믿는 주민들과 열정적인 예술가들, 기관 및 기업의 협치와 상생으로 일군 공동지성의 결과물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요소들이 충족될 때 비로소 한국판 '제2의 무엇'을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자연을 살리고 예술로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의지와 소신, 지역의 풍토와 역사성에 대한 통찰, 고유 자원에 관한 민·관·예의 충분한 학습 및 대화의 과정이 필수이다. 특히 예술을 통한 공공의 선 구축이라는 확고부동한 명제가 없다면 단지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망상은 실패의 학습이고.

■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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