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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지갑 속 엉터리 그림들



최근 한 방송작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며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에 대해 물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풀과 벌레 등에 담긴 의미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에 씨가 많은 수박은 다산을 뜻하고, 변태를 거치는 나비에는 훌륭한 인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설명해줬다. 실제로 수박을 비롯해 쥐나 개구리, 맨드라미, 방아깨비 등도 기복과 출세, 장수 등과 관련되어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신사임당은 조선의 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지만,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안견의 산수화를 보고 그림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시와 글씨에도 능했다. 그림 또한 초충도를 포함해 산수, 묵죽 등의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오죽헌시립박물관, 동아대박물관, 간송미술관 등에 가면 그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신사임당의 그림은 가장 가까운 곳, 우리 지갑 속에도 있다. 바로 5만원권 지폐이다. 지난 2009년 발행된 이 지폐 앞면에는 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묵포도도'(墨葡萄圖)와 자수로 된 8폭짜리 병풍 '초충도수병'(草蟲圖繡屛) 중 제7폭에 있는 가지 그림이 함께 새겨져 있다. 뒷면 작품은 조선중기 선비화가였던 어몽룡의 '월매도'(月梅圖)와 이정의 '풍죽도'(風竹圖)이다.

한데, 이 그림들은 모두 엉터리이다. 이른바 '뽀샵' 처리를 심하게 한 바람에 원작과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묵포도도는 원래 비단에 그려진 수묵화이다. 윤곽선 없이 먹으로 직접 형태를 짓는 몰골법(沒骨法)으로 표현되어 있다. 필세(筆勢)와 더불어 은은한 먹의 농담 변화가 특징이다.

하지만 지폐의 묵포도도는 색을 발라 놨다. 포도와 잎사귀가 녹색과 갈색이다. 그나마도 원작에 있던 아래 줄기와 잎사귀는 생략해버렸다. 그림 중 일부를 제 맘대로 이리저리 재단하고 갖다 붙인 경우다. 그래도 신사임당의 또 다른 작품인 초충도수병의 가지 그림에 비하면 묵포도도의 왜곡은 양반이다.

자세히 보면 묵포도도 아래 희미하게 가지 그림이 배치돼 있다. 사실 검은 비단에 수를 놓은 원작을 모른다면 그게 가지인지 뭔지 알 수 없다. 그저 어느 이름 모를 풀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더구나 초충도의 생명인 나비도 뺐다. 곤충 없는 풀벌레 그림인 셈이다.

5만원권 뒷면 작품들도 원작의 가치가 훼손되었긴 매한가지이다. 앞서 언급한 어몽룡의 월매도와 이정의 풍죽도이다. 일단 매화를 그린 월매도는 본래 세로형 그림이다. 하지만 지폐엔 가로로 뉘어 있다. 누가 보아도 횡축으로 읽히는 지폐에 세로그림을 넣는 우를 범한 것이다.

황당한 건 하늘 높이 솟은 가운데 줄기는 한 토막이 절단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마디에서 꺾여 다시 가늘게 나아가던 오른쪽 작은 줄기 역시 가지치기를 당했다는 점이다. 특히 가운데 줄기 끄트머리에 나란히 걸려 있던 원래의 '달'을 전혀 다른 줄기에 뚝 떼어 붙여 놨다. 이로 인해 원화에 존재하던 군자다운 매화의 기품은 완전히 사라졌다. 꼿꼿한 선비정신과 자태를 담은 그림이 졸지에 반편이가 되고 말았다.

이뿐이 아니다. 어몽룡, 황집중과 함께 삼절로 불렸던 이정의 풍죽도 또한 엉망이다. 바람에 맞서는 네그루의 대나무를 그린 이 그림은 선비의 강인한 기개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지폐에선 원화의 오른쪽 여백을 삭둑 잘라내었고, 바위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완성도 면에서 절대 월매도에 뒤지지 않을 풍죽도를 마치 월매도의 장식마냥 배치해 한 작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조선의 초충도는 핍진(逼眞)이라 하여 형상은 터럭 하나까지 실물과 같도록 그려야 하며 문인화의 요체이자 핵심 미학은 사의(寫意)로써, 정신이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5만원권 그림들은 그러한 맥락과는 아무 상관 없다. '뽀샵'으로 만든 국가 공인 위작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갑에 넣고 다니는 지폐 속 작품의 실체이자, 제대로 된 도안으로 바꿔야 할 이유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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