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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지역

[되살아난 서울] (137) 옛 풍류 만끽하는 서울 '인왕산 숲길'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찾았다./ 김현정 기자

서울은 조선 왕조 600년 수도로, 당대 왕들에 얽힌 옛이야기를 간직한 장소가 많다.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인왕산도 그중 하나다.

 

서울역사편찬원이 펴낸 '서울 지명사전'에 따르면, 신라 시대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선대사는 "국도를 정할 때 스님의 말을 들으면 국기가 연장될 것이나 정가(鄭家)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 혁명이 발생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그의 불길한 예언은 현실이 됐다. 조선을 세운 후 궁궐터를 물색하던 태조에게 왕사(임금의 스승 역할을 하는 승려)인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정하고, 북악과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풍수의 핵심 개념인 '주산'은 혈의 뒤에 자리해 중심축이 되는 산을 이르는 말로, 주산이 바르면 나라가 바로 선다는 설이 있다. 주산을 가운데 두고 좌청룡, 우백호, 주작(남방을 수호하는 신)을 경계로 하나의 국(局)이 형성된다.

 

정도전은 "예로부터 제왕은 남면해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며 '인왕산주산론'을 정면 반박했다. 삼봉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낙산과 인왕산을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고, 목멱산(남산)을 향해 남향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북악산주산론'을 폈다.

 

태조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 줬고 현재의 위치에 경복궁이 지어지게 됐다. 무학대사는 "나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도읍을 다시 생각해야 할 날이 올 것"이라며 한탄했다.

 

도선대사의 말대로 5대 만인 단종 1년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뺏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켰고,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1392년에서 정확히 200년이 흐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역사에 만일은 없지만, '북악산이 아닌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았다면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사랑했던 장소

 

1일 서울 종로구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방문했다./ 김현정 기자

인왕산길은 여러 개다. 사직단에서 시작해 단군성전, 국궁전시관, 황학정, 전망대(무무대), 서시정, 윤동주문학관에서 끝나는 총 길이 2.7km 코스의 '인왕산 자락길'과 택견수련터에서 출발해 수성동 계곡, 해맞이동산, 구름다리(가온다리), 이빨바위, 청운공원,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확관에 도착하는 총 길이 2.5km인 '인왕산 숲길'이 대표적이다.

 

한국 고유의 화풍을 만든 겸재 정선이 살았던 터를 돌아보며 그림에 얽힌 역사를 알아가는 '진경산수화길'도 있다. 이 길을 걸으면 윤동주문학관, 백운동(백운동천), 청송당터, 겸재 정선 생가터, 백세청풍, 자수궁터, 송석원터, 수성동 계곡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지난 1일 인왕산 숲길을 걸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수성동 계곡'이었다. 화강암으로 뒤덮인 돌산 사이에 좁고 가느다란 물길이 나 있었다. 물소리가 유명해 조선 시대부터 '수성동'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계곡물이 거의 메말라 청량한 물소리를 들을 순 없었다.

 

이달 1일 인왕산 숲길을 걸었다./ 김현정 기자

대신 U자로 꺾여진 소나무, 땅과 30도 기울기로 나는 소나무, 노인의 굽은 등처럼 줄기가 휜 소나무 등 암반 사이로 난 갖가지 수형의 나무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서울역사편찬원은 "인왕산 아래 수성동 계곡 일대는 조선 시대부터 경관이 빼어난 장소로 유명했다. 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 그리고 영화 남한산성에서 강직한 신하의 모습을 보여줬던 김상헌의 일가가 터를 잡고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는 중인들이 많이 거주하며 위항문학의 중심지가 됐던 지역이었다"고 했다.

 

풍류를 아는 예술가였던 안평대군은 수성동 계곡에 '비해당(匪懈堂)'이란 별장을 만들고, 이곳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게으름 없이'라는 뜻을 지닌 '비해'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 '숙야비해 이사일인(夙夜匪解 以事一人·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한 사람을 섬기라)'에서 따온 말이다.

 

안평대군을 비롯한 당대 문인들은 비해당을 둘러싼 자연에서 48가지 아름다움을 찾아내 이를 찬양하는 '비해당사십팔영시(匪懈堂四十八詠詩)'를 남겼다. 조선의 예술가들은 만년송에서는 군자의 절개를 발견했고, 꽃비둘기로부터는 신선의 삶을 느꼈다고 한다.

 

◆겸재 정선 덕에 제 모습 찾은 '수성동 계곡'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찾았다./ 김현정 기자

1970년대 서울에 분 개발 붐은 수성동 계곡에도 위기를 불러왔다. 서울시가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개동을 건립하면서 일대 경관이 훼손된 것. 시는 아파트를 허물고 복원 사업을 진행키로 결정했다.

 

서울역사편찬원은 "2009년 옥인시범아파트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정선의 '장동팔경첩'의 '수성동' 속 돌다리 '기린교'가 발견됐다"면서 "겸재 정선의 그림 덕분에 수성동 계곡이 복원됐다. 정선의 그림이 오늘날 우리에게 수성동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힌트를 준 것이다"고 설명했다.

 

1일 서울 종로구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방문했다./ 김현정 기자

이날 계곡 아래에서는 다리미판처럼 생긴 돌다리 기린교를 볼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기린교는 한양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대로 보존된 통돌로 만든 제일 긴 다리이다.

 

위항시인인 박윤묵은 자신의 문집 '존재집'에서 수성동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때때로 날리는 포말이 옷을 적시면 /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 혼이 맑아지고 정신이 시원해지며 / 마음이 편안하고 뜻이 통쾌해진다 / 호탕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 이 세상 바깥으로 노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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