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숭인동에는 '숭인근린공원'이 있다. 서울지명사전에 따르면 숭인동 동명은 조선시대 초 성 밖에 있던 한성부 동부 12방 중 하나인 숭인방과 인창방의 첫 글자를 합져 지었다고 한다. 조선왕조는 1394년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이듬해 수도의 이름을 한양에서 한성부로 바꿨다. 태조 5년(1396년) 한성부 행정구역이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총 5부로 나뉘었고 이는 다시 52방으로 구획돼 방명표가 세워졌다. 5부 중 하나인 동부의 도성 안에는 연희방·숭교방·천달방·창선방·건덕방·덕성방·서운방·연화방·관덕방·흥성방 등 10개 방이 있었고, 성 밖에는 숭신방과 인창방 2개 방이 존재했다.
1980년 개원한 숭인공원은 위에서 바라보면 다리가 짧고 코가 긴 개, 닥스훈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지난 2일 인기리에 종영된 TV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봉태규가 들고 나온 강아지 가방(헥터백: 디자이너 톰브라운이 자신의 반려견을 본떠 만든 가방)을 떠올리면 된다.
◆정순왕후 삶 켜켜이 녹아내린 공원
이달 26일 오후 정순왕후의 그리움이 사무친 장소인 숭인근린공원을 방문했다. 지하철 1호선 동묘역 10번 출구로 나와 보문동 방향으로 가다가 보담사를 거쳐 좁은 골목길을 따라 약 10분(535m)을 걸었다. 지봉로12가길은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돌리는 소리와 '부우우웅' 옷감을 잔뜩 실은 오토바이 달리는 소리로 활력 넘쳤다.
시끌벅적한 골목을 지나면 공원 진입로가 있는 조용한 숲길이 나온다. 숭인공원 가는 길을 제대로 찾았다면 돌이 산더미처럼 쌓인 돌탑과 그 옆으로 난 나무계단을 볼 수 있다. 돌탑의 크기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컸다. 성인 너댓명이 손잡고 양팔을 쫙 벌린 채 큰 원을 그려야 간신히 둘러쌀 수 있을 정도로 밑동이 두터웠다. 동망산 산신령이 이곳에 돌을 얹은 다음 소원을 빌고 간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못 본 체하고 지나칠 순 없겠다 싶었다.
이날 공원 초입에서 만난 동네주민 김모 씨는 "옛날에 우리 아들 고3 때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부처님, 예수님, 하나님께 저기 돌 올리고 빈 적이 있다"면서 "그런데 애가 공부를 하지 않아선지 신들이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김 씨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기는 정순왕후가 옛날에 살았던 곳이니 그분께 소원을 빌었어야 했던 것 같다"면서 "다음에 중요한 일 있으면 외국 신 말고 우리 조상님들께 간청해봐야겠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숭인근린공원은 조선 6대왕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정순왕후는 여산 송씨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됐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읜 단종은 아내인 정순왕후에 의지하며 지냈다. 숙부인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물려주고 상왕이 돼 수강궁(현 창경궁)으로 물러났다. 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한 사육신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고 세조는 단종의 신분을 노산군으로 낮춘 뒤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청계천 영도교에서 이별했다.
궁궐을 나온 정순왕후는 숭인공원이 자리한 동망산 기슭에 초가집(정업원: 지금의 청룡사)을 짓고 살며 매일 봉우리에 올라가 남편이 귀양을 간 동쪽(영월쪽)을 바라보며 망왕의 명복을 빌어 동망산 봉우리에 '동망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종로구는 동망봉에 팔각 정자를 건립하고 '동망정'이라 명명했다. 돌탑을 지나 동망정에 올랐다. 정자에서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연인 한 쌍을 만나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단종과 정순왕후가 억겁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태어나 현생에서 또 한 번 연을 맺는다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로 텅 빈 공원
동망정 외에도 숭인근린공원엔 주민들끼리 친목을 다질 수 있는 '동망봉 열린 북카페',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놀이터 '유아숲체험장',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배드민턴장' 등 놀거리가 넘쳐났지만 이날 오후 공원에는 사람보다 새가 더 많았다. 딱새, 비둘기, 까치가 나뭇가지와 덤불 위를 분주하게 오가며 '짹짹, 깍깍' 공원에서 시끄럽게 지저귀는 반면 사람은 3~5분 간격으로 드물게 나타나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지난 26일 숭인근린공원을 찾은 주부 박모 씨는 "길고양이 밥 주러 잠깐 왔다"며 "이 동네에 노쇠한 어르신들이 많아서 그런지 최근 코로나가 심해지고 나서는 공원에 운동 오는 사람이 확 줄었다"고 말했다.
이어 "고양이도 자기한테 밥 주는 사람들이 사라져서인지 그동안 저한테 다가온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 처음 가까이 왔다"면서 "너무 설레고 기분 좋은데 옛날처럼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공원도 그립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숭인공원은 종말을 앞둔 세상의 모습처럼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아숲체험장과 동망각 옆에 설치된 팔각정자에는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게 빨간색 출입금지선이 둘러쳐져 있었고 드넓은 운동장엔 '코로나19 방역조치 강화로 인해 실외 공공체육시설을 일시 폐쇄한다'는 플래카드만 덜렁 걸려 있었다.
종로구 창신동에 사는 정모 씨는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에서도 마스크만 잘 쓰고 있으면 코로나 안 걸린다고 했으면서 공원에서 배드민턴도 못 치게 하는 건 이해가 안 되는 처사다"면서 "사람들 다 집에 가둬놓고 실외 놀이시설도 이용 못 하게 하는데 정말 화가 난다. 전부 다 막는게 능사는 아니다. 그런 건 무능한 행정"이라고 일갈했다.
Copyright ⓒ Metro. All rights reserved. (주)메트로미디어의 모든 기사 또는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를 금합니다.
주식회사 메트로미디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7길 18 ㅣ Tel : 02. 721. 9800 / Fax : 02. 730. 2882
문의메일 : webmaster@metroseoul.co.kr ㅣ 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 이장규 ㅣ 신문사업 등록번호 : 서울, 가00206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2546 ㅣ 등록일 : 2013년 3월 20일 ㅣ 제호 : 메트로신문
사업자등록번호 : 242-88-00131 ISSN : 2635-9219 ㅣ 청소년 보호책임자 및 고충처리인 : 안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