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에 시험을 보다가 긴장돼 아랫배가 살살 아파와 조용한 교실에서 '뿡' 소리가 안 날 줄 알고 한쪽 엉덩이를 들고 슬쩍 방귀를 뀌었는데 '뽝'하고 천둥이 쳐 창피했던 경험,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밤에 자려고 누울 때마다 머리 위로 떠올라 이불 안에서 발차기하게 만드는 이런 일들을 우리는 '흑역사'라고 부른다.
사람이 아닌 남산조차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싶은 악몽을 갖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백악(북악산)·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한양도성을 축조하라고 지시했다. 풍수지리상 안산 겸 주작에 해당하는 남산에는 태조가 봄·가을 제사와 기우제를 지냈던 국사당과 당시 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가 설치됐다. 주작은 사신 중 하나인 남방의 수호신을, 안산은 풍수지리에서 궁궐이나 집터 등의 맞은편에 있는 산을 의미한다.
조선 개국의 성지인 남산은 누구나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곳이었다. 조선 왕조는 백성들이 남산의 풀 한포기, 돌 한움큼, 나무 한그루 캐갈 수 없게 함은 물론이거니와 묫자리로도 쓰지 못하게 엄히 다스렸다.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땅인 남산은 어쩌다 잊고 싶은 과거를 간직하게 됐을까?
◆남산으로 떠나는 '암흑사 여행'
남산 예장자락은 조선시대 군사들의 무예훈련장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예장 터를 근거지 삼아 활동했고 이 인연으로 일제강점기부터 남산 훼손이 본격화됐다. 우리의 국권을 강탈해 간 일제는 1925년 남산에 신궁을 지으면서 이보다 높이 있는 국사당을 철거한 뒤 신당 일부를 인왕산 서쪽으로 옮겼다. 조선신궁을 건립한 일제는 남산골 일대를 일본인 거주지로 정하고 통감부를 짓는가 하면 신사와 사찰을 우후죽순 만들어내며 식민 통치에 열을 올렸다.
지난 10일 민족 수난의 역사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남산예장공원'을 찾았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 1번 출구로 나와 남산서울타워가 있는 방향으로 8분(412m)을 걸었더니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쭉쭉 뻗은 소나무 여러 그루와 함께 남산예장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시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남산 예장자락의 원형을 녹지공간으로 되살려 올해 첫날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예장자락 상부엔 총 1만3036㎡ 규모의 녹지 공원이 조성됐다. 남산예장공원에는 ▲소나무가 빽빽이 심어진 '예장숲' ▲조선총독부 관사 터의 기초 일부분을 보존한 '유구터' ▲옛 중앙정보부의 지하고문실을 재현한 '메모리얼 광장' 등이 들어섰다.
서울 중구 약수동에 사는 고모(58) 씨는 "예장자락 둘레길이 산책 코스 중 하나라 자주 오는데 맨날 공사만 하고 있어서 대체 저기에 뭘 만들려고 저러나 궁금했는데 멋진 공원이 생겨 기쁘다"면서 "여기가 이완용이랑 데라우치가 경술국치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고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배경이 되기도 한 치욕의 역사적 현장인데 이런 거는 다 남겨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 씨는 "이런거 왜 남겨놓냐고 말하는 사람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다. 날조해 가르치는 건 역사가 아니"라면서 "역사는 오늘을 살 수 있는 힘이고 내일을 다르게 사는 거울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해 반드시 잊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소방재난본부가 보이는 남산예장공원 우측에는 험하게 뜯긴 콘크리트 잔해와 건물터가 남았다. 갓 구운 쿠키를 둘로 쪼갠 모양으로 설치된 조형물이 바닥에 함께 놓였는데 거기엔 '이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사, 광복 뒤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 6국이 있던 자리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시는 예장공원에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어두운 역사를 되새기는 공간인 '기억6'를 마련하고 이곳에 빨간색 우체통 모양의 전시공간 '메모리얼 홀'을 뒀다.
기억6는 1961년 5.16쿠데타 직후 설치된 중앙정보부 6국 자리에 세워졌다. 학원 사찰과 수사를 도맡았던 6국은 중앙정보부 내에서도 혹독한 고문과 취조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은 1995년 안기부가 중구 예장동에서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서울시가 매입해 시청 남산2청사로 사용했다. 이후 시는 2015년 남산 예장자락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이듬해 설계 공모 당선작을 선정했다. 시는 2017년 공사를 시작해 올해 남산예장자락 재생사업을 마무리했다.
시는 "과거와 소통하자는 의미를 담아 메모리얼 홀을 빨간 우체통 모양으로 건립했다"며 "메모리얼 광장 지하엔 군사독재 시절 고문으로 악명 높은 옛 중앙정보부의 지하 고문실을 재현했고 지상은 전시실로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코로나로 관광버스 주차장은 썰렁
예장공원 하부엔 버스주차장이 마련됐다. 관광버스뿐만 아니라 서울시가 운영 중인 녹색순환버스의 주차장과 환승장으로 이용되는 곳으로 8485㎡(총 41면) 크기로 만들어졌다. 시는 그간 명동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불편과 주차난을 해소하기 위해 버스주차장을 조성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10일 오후 주차장 내부에는 서울소방재난본부의 대형버스와 전기를 충전 중인 녹색순환버스가 각 1대씩 총 2대가 서 있었다. 전체 공간 중 4.8%만 사용되고 나머지는 제 기능을 못해 내부가 휑뎅그렁하게 비었다.
이날 남산예장공원에서 만난 윤모(73) 씨는 "지금 현재 코로나 때문에 관광객이 없어서 그렇지 주차장을 잘 만들어놔서 좀 있으면 중국이나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 오기 시작하면 여기가 꽉 찰 것"이라며 "시간당 500원이면 거저다. 남산에 놀러 왔는데 주차 때문에 불편했던 관광객들이나 장시간 운전으로 지친 버스기사들이 공원에서 쉬었다 갈 수도 있어 참 편할 것이다. 역이랑 가까워 접근성도 높은데 홍보가 제대로 안 돼 일반시민들이 잘 모르는 게 딱 하나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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