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두 개의 정릉이 있다.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정릉(靖陵)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이 모셔진 곳이고,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에 자리한 정릉(貞陵)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이다. 정릉은 숫자 '2'와 인연이 깊다. 대한민국의 수도에 같은 이름을 가진 두개의 능이 있고, 중구 정동과 성북구 정릉동 2곳의 행정동명은 정릉에서 따왔으며, 신덕왕후 강씨가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점에서 그러하다.
◆왕후에서 후궁으로 강등되는 수모 겪은 조선의 첫번째 왕비
서울의 기온이 영하 16도까지 곤두박질친 지난 26일 오후 성북구에 있는 '정릉'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하차해 6번 출구로 나와 '성북22'번 마을버스를 탔다. 9개 정류장을 이동해 중앙하이츠빌아파트에서 내려 331m(7분 소요)를 걸었더니 검은색 한옥 기와가 얹혀진 정릉 입구가 나왔다. 매표소 직원은 입장권 할인 대상자인지 확인하기 위해 "성북구민이냐"고 물었다. 기자는 "성북구에 살고 있지 않다"고 답한 뒤 일반 요금인 1000원을 결제하고 입장했다.
정릉은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짧은 곱슬머리를 한 사람의 왼쪽 얼굴 같이 생겼다. 턱부분에 자리한 매표실에서부터 반시계방향으로 ▲재실 ▲관리사무소 ▲홍살문 ▲수라간 ▲정자각 ▲수복방 ▲비각 ▲신덕고황후릉이 차례로 들어섰다.
정릉에는 태조의 두번째 왕비인 신덕황후 강씨가 잠들었다. 신덕황후는 태조의 경처(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로 있다가 조선 개국 후 현비로 책봉됐다. 태조와 사이에 2남(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녀(경순공주)를 낳았으며, 1396년(태조 5년)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했던 왕은 궁에서 가까운 곳인 한성부 황화방(현 중구 정동)에 웅장하게 능을 조영했다. 그러나 계모를 미워했던 태종 이방원은 태조가 죽은 뒤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1409년 도성 안에 있던 능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버렸다. 이 과정에서 옛 정릉의 병풍석 등 석물은 청계천 광통교 복구에 사용됐고, 왕후의 신주도 종묘에서 제외되는 수난을 당했다.
그후로부터 260여년이 흐른 1669년 현종이 송시열의 상소를 받아들여 복권을 명했고, 정릉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재조성됐다. 혼유석('혼이 노니는 곳'이라는 뜻으로 '석상'으로도 불림)과 그 받침돌인 둥근 고석, 장명등(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등)만이 옛것이고 나머지는 현종 대에 새로 세워졌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정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는 2009년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속세와 능역을 구분 짓는 다리인 '금천교'를 건너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홍살문'이었다. 9m 이상의 홍시색 기둥 2개 사이로 지붕 없이 화살 모양의 뾰족한 나무가 머리털처럼 콕콕 박혀 있었다. 악귀를 쫓기 위해 붉은색으로 칠했고, 나쁜 액운을 화살 모양의 나무살로 공격한다는 의미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신성한 장소를 수호하는 홍살문이 제 역할을 다 해서인지 이날 오후 정릉은 평화로웠다. 동네 노인들은 십자가 첨탑에 나란히 앉은 참새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댔다. 이들은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 동지 섣달 꽃본듯이 날좀보소 /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라는 노랫말을 가진 밀양아리랑을 제창했다. 이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은 기우나니라 /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라는 가사를 읊어대며 흥을 끌어올렸다.
신덕황후의 묘는 얕은 동산 위에 자그마하게 봉긋 솟아 있었다. 아쉽게도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게 묘역을 조성해놔 가까이에서 볼 수는 없었다.
◆속세의 근심 씻어내는 '팥배나무 숲길'
별 볼 것 없는 능을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길은 참나무 숲길(중간 숲길)과 팥배나무 숲길(외곽 숲길) 두개로 나뉘어 있었다. 0.37km의 짧은 코스로 짜여진 참나무 숲길을 뒤로하고 1.44km(약 40분 소요)의 팥배나무 숲길을 걸었다. 앞서 가던 어르신에게 '추운 날 무슨 고생을 하러 이곳까지 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 원래 이런 궁이나 능, 문화 유적지 같은 곳들은 아주 춥거나, 아주 덥거나, 눈이 펑펑 내리거나,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 와야 사람이 없고 고즈넉하니 좋다"면서 "젊은 사람이 뭘 모르네"라며 혀를 끌끌 차더니 재빠른 속도로 기자를 지나쳐 갔다.
혼자 심심하게 산길을 오르다가 섬뜩한 안내문을 발견했다. 정릉 내 멧돼지 출현 흔적이 발견되고 있어 숲길 등 공개구역 외 출입을 금한다는 알림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멧돼지가 화났을 때 내뿜는 '컹컹'거리는 콧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름이 끼쳐 뒤를 홱 돌았는데 다행히 멧돼지가 보이지 않았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멧돼지를 발견하면 '절대 정숙하며 뛰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멧돼지를 주시하고 등을 보이지 않는다', '나무나 바위, 구조물 등의 은폐물 뒤에 숨는다', '우산, 천, 깔개가 있을 시에는 펴서 든 상태로 뒤에 숨는다', '멧돼지 새끼를 보면 만지거나 안지 않는다'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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